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너드 번스타인 (문단 편집) == 생애 == 레너드 번스타인은 미국 [[보스턴]] 인근의 로렌스라는 마을에서 [[우크라이나]]계 [[유대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번스타인의 아버지 샘은 러시아 치하에 있던 우크라이나의 정통 유대인 촌에서 태어나 자라며 [[랍비]]가 되려고 했으나 16세때 제정 러시아 군의 징집을 피해 미국으로 달아났다. 샘은 뉴욕 어시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유통업자로 성공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샘은 낮에는 세속적인 사업가의 삶을 살았지만 밤에는 가정에서 매우 엄격하고 보수적인 유대교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소년 시절 번스타인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고 즉시 암기해 [[피아노]]로 연주할 정도의 [[절대음감]]과 비상한 기억력을 보여주었고, 계속 피아노 개인 레슨과 음악이론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 샘은 아들의 음악 재능에 대해 별로 탐탁치 않게 여겼고 이로 인해 부자간의 갈등이 발생했다. 번스타인은 보스턴에서 사립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아버지 샘은 번스타인이 가문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음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을 매우 못마땅해 했다. 1935년에 [[보스턴]]의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이론가로 유명한 월터 피스턴에게 음악이론 전반을 집중적으로 배웠고, 대학 합창단의 반주자로 뛰거나 학교 연극제에 쓸 무대음악을 작곡하는 등 일찍부터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하버드 졸업 후에는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에서 지휘와 피아노, 작곡, 대위법, 관현악법 등을 배웠는데, 특히 지휘 수업에서는 대단히 깐깐하기로 소문났던 [[프리츠 라이너]]에게 유일하게 A학점을 받아 화제가 되었다. 커티스를 졸업한 직후인 1940년에는 보스턴으로 돌아왔고,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주최의 여름 음악제 겸 음악캠프가 열리는 탱글우드에서 당시 악단 수장이었던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보조 지휘자로 재직하며 관현악 지휘 경험을 쌓았다. 1943년에는 [[뉴욕]]에서 [[뉴욕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당시 음악 고문을 맡고 있던 [[브루노 발터]]가 병에 걸려 출연이 취소되자 급하게 대역으로 발탁되어 무대에 섰다. 제대로 된 공연 리허설도 없이 치러야 했던 공연이었지만, 시카고 교향악단의 시어도어 토머스 이래로 미국인 지휘자가 공식 무대에 선 사례가 거의 없던 미국 관현악단 역사상 굉장한 기대를 모았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본격적인 지휘자 인생을 시작했다. 작곡가로는 1942년에 첫 [[교향곡]]을 발표했다. 1944년에는 [[뮤지컬]] '온 더 타운'을 발표해 브로드웨이에도 진출했다. 번스타인을 소개한 글에서는 보통 1943년에 브루노 발터의 대타로 뉴욕 필에 데뷔한 후 탄탄대로를 걸은 것처럼 소개되어 있지만, 사실 이후 십여년간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지휘자로서 아직 짧은 경력 때문에 오케스트라에 고정적인 포스트를 얻지 못하고 객원지휘자 생활을 전전했으며 그나마 자주 들어오지 않아 자살을 생각할 정도 암담한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1945년에는 당시 막 창단된 뉴욕시티 교향악단 지휘자로 부임해 현대음악 등을 공연했다. 하지만 두 시즌 후 그만두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한때 [[서독]] 등 유럽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나치 부역혐의로 유명 지휘자들이 대거 활동이 중지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번스타인에게는 좋은 기회가 됐었다. 그러나 아직 2차 대전 때의 적대감이 가시지 않았을 때라 유대계 미국인인 번스타인은 독일인들을 상당히 껄끄럽게 생각했고, 서독의 음악인들 역시 당시 클래식 음악의 불모지라 여겼던 미국에서 온 청년 지휘자를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긴 듯 하다. 때문에 단원들과 트러블도 잦았고 결국 서독에서의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한편 번스타인은 종전 후 독립을 모색하던 이스라엘까지 건너가 막 창단된 팔레스타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악단 발전에 크게 공헌하기도 했다. 이 오케스트라는 나중에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50년대 초 미국에 매카시즘 광풍이 불어닥친 판에 번스타인도 공산주의자로 지목되어 활동에 큰 타격을 받았다. 번스타인은 대학 시절 공산주의 클럽인 '존리드 소사이어티'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고, 졸업 후 뉴욕 필의 부지휘자가 되었을 때는 '뉴욕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후신인 '뉴욕 민주 청년 모임'에 가입했으며 그밖에도 여러 공산주의, 자유주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사실 번스타인이 50년대 들어 활동 반경이 급격히 줄어든 것은 매카시즘 때문이 아니라 그의 스승 쿠세비츠키가 1951년 사망한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쿠세비츠키의 사망으로 그동안 그의 본거지였던 보스턴에서의 일도 거의 끊겨버린 것. 비록 번스타인이 공산주의자로서 CIA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일상 생활이나 사회 생활에는 전혀 지장을 받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은 이미 대학 시절부터 암암리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서 그를 꺼린 부분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쿠세비츠키의 사망과 매카시즘 등으로 무대 기회가 크게 줄어들었지만, 대신 1951년부터 5년간 보스턴 인근 브랜다이스 대학교(Brandeis University)에 비전임 교수로 일했다. 이 곳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홀로코스트의 충격 속에 미국 유대인들이 모여 설립한 대학으로 교수진이 유대인 일색으로 구성되었으며, 교육 이념에 유대교 영향이 반영되어 있던 곳이었다. 번스타인은 설립된지 얼마 안된 이 대학에서 교육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예술 축제를 기획하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나중에 TV로 갑작스레 유명해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대학에서 정교수가 되어 여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50년대 전반기에는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작곡 활동에 주력하며 계속해서 이런 저런 뮤지컬이나 오페라 등 무대 작품들을 작곡해 나갔다. 50년대 중반이 되어서 매카시즘이 잠잠해질 때 쯤 번스타인에게 기회가 왔다. 1954년 CBS의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면서 그의 인생은 바뀌게 되었다. 수려한 외모와 동부 액센트가 섞인 중저음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 열정적인 지휘 동작, 게다가 방송사는 번스타인의 작은 키를 커보이게 하기 위한 앵글을 사용했다. 이 방송으로 이 잘생긴 젊은 미국인 지휘자는 단번에 미국 전역에 얼굴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방송에 출연한지 2년여만에 번스타인은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하게 된다. 사실 이 방송에 출연하여 얼굴을 알리기 전에 번스타인은 뉴욕 필을 거의 지휘할 기회가 없었다. 그의 데뷔 공연으로 널리 알려진 1943년 공연 이후 1951년 뉴욕 필 정기연주회에 출연하여 당시 미국 현대 음악의 첨단에 있던 찰스 아이브즈의 교향곡 2번을 세계 초연한 것이 전부였다. 1957년에는 세 번째 뮤지컬 작품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내놓아 대박을 쳤고, 이내 번스타인의 최대 성공작이자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1954년 CBS의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번스타인은 이후 ABC, NBC 등 여러 방송의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뮤지컬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1956년말 뉴욕 필에 초청되어 5년만에 뉴욕 필을 지휘하게 된다. 이듬해인 1957년 번스타인은 미트로풀로스와 함께 뉴욕 필의 공동 상임지휘자에 취임했고 이어, 1958년에는 단독으로 뉴욕 필의 사상 두 번째 미국인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11년 동안 재임하면서 콜럼비아(CBS, 현 소니 클래시컬)에 바로크에서 현대작품을 포괄하는 많은 양의 녹음을 남겼다. 정통 레퍼토리의 상당수를 녹음했고 나아가 당시에는 생소했던 작품들도 다루었는데, 대표적으로 [[구스타프 말러|말러]]의 교향곡 전집을 세계 최초로 녹음하기도 했고[* 당시 번스타인과 함께 쿠벨릭, 아브라바넬 등이 동시에 말러 교향곡 전곡 녹음을 진행했다. 번스타인이 가장 먼저 시작했으나 완성은 가장 늦었다.], 이외에도 [[덴마크]] 작곡가 [[칼 닐센]]과 [[소련]]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녹음, 자작곡을 포함, [[에런 코플런드]] 등 여러 미국 작곡가들의 관현악 작품의 녹음도 남겼다. 굉장한 입담과 해박한 지식을 활용해 청소년들에게 [[클래식(음악)|클래식]]을 거부감없이 듣게 할 목적으로 시작한 '청소년 음악회' 도 뉴욕 필 재임기에 행해진 연속 연주회였는데, [[CBS(미국 방송)|CBS]] 텔레비전 네트워크를 통해 미국 전역에 중계되어 클래식 청취 인구의 증가에 큰 몫을 했다. 이 때 녹화된 필름들은 훗날 세계 각지에 수출되어 방영되었고, [[대한민국|한국]]에서도 [[한국교육방송공사|EBS]]를 통해 전 시리즈가 방영된 바 있다. 1969년 번스타인은 뉴욕 필 상임지휘자직에서 물러났다. 표면적인 이유는 작곡 활동에 좀 더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서였다. 뉴욕 필은 번스타인을 계관지휘자로 추대하여 그간 뉴욕 필에서 쌓아온 업적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사실 번스타인은 이미 뉴욕 필에서 자신의 위치가 확고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나 적당히 쉬면서 뉴욕 필을 지휘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당연히 뉴욕 필을 지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는데, 세상물정에 어둡고 사람 좋아 보이던 후임 [[피에르 불레즈]]가 의외로 독하게 전임자 지우기에 나선 것이었다. 불레즈는 번스타인의 뉴욕 필 객원지휘를 원천봉쇄했다. 사실 겉으로는 불레즈가 사람 좋아 보이지만 그가 인터뷰한 내용을 한 번 만이라도 본적이 있다면 보기와는 달리 매우 독하고 출세욕이 강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불레즈가 취임 이후 클래식 시장의 수요를 무시하고 자신의 입맛대로 레퍼토리를 꾸렸다는 데서 번스타인의 대중친화행보에 반감을 느꼈다고 볼 수도 있다. 불레즈가 뉴욕 필 지휘를 계속 방해하자 번스타인은 깊은 불쾌함을 표했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고 결국 유럽 진출을 모색하게 된다. 1970년대 유럽에 진출한 번스타인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주요 객원 지휘자가 되었고,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유럽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정기적으로 공연을 가졌다. 또 [[도이체 그라모폰]]과 장기 계약을 맺고 빈 필을 중심으로 방대한 음반을 녹음했는데, 당시에는 드물었던 실황 녹음 방식으로 대부분의 음반을 녹음했다. 물론 미국 활동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1971년에 [[가톨릭]] 미사 형식과 반전 평화 운동의 메시지, 미국의 현대 대중음악인 [[록 음악]]과 [[재즈]]의 어법을 혼용한 '미사'[* 규모가 엄청 크다. 그래서 전체 제목이 '''MASS: A Theatre Piece for Singers, Players, and Dancers'''일 정도니.]를 발표해 굉장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73년에는 모교인 하버드 대학교에서 열린 특별 음악 강좌 시리즈에서 강의하기도 했는데, 이 강의도 녹화/녹취되어 '대답하지 않은 질문(The Unanswered Question)' 이라는 타이틀의 책과 음반, 영상물로 발매되어 오늘날에도 회자되고 있다.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영화 [[타르]]에서도 어린시절 TV로 보던 이 프로그램을 보며 주인공인 지휘자 리디아가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번스탄인의 질문에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독일|서독]]의 영화사인 유니텔에서 자신의 공연으로 제작한 영상물을 다량으로 녹화했다. 특히 빈 필과의 말러 교향곡 전곡 영상물(2번은 런던 심포니가 연주했다)[* 음반에 이은 영상물로도 세계 최초의 기록이다.]은 당시 지상파로 방영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78년말 남미로 여행을 갔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큰 고생을 했다. 반년 이상 지휘를 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아팠다. 1979년 여름에야 회복을 하였는데, 투병 결과인지 외모에도 변화가 생겼다. 병상에서 일어나 지휘대에 복귀한 79년 일본 공연 모습을 보면 윗눈꺼풀이 완전히 들어가 있어서 인상이 상당히 달라졌다. 78년 이전과는 확연히 달리진 모습이다. 79년 하반기에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뉴욕 필의 일본, 한국 순회 공연 등)과 말러 교향곡 제9번(로열 콘서트헤보, 베를린 필과)을 주 레퍼토리로 삼았는데, 투병의 고통스런 경험 덕분에 말러 교향곡 제9번을 더 잘 이해하고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77년 빈 필과 베토벤 교향곡 전집 녹음을 시작했고, 이후 브람스, 슈만 교향곡 전곡을 비롯한 주요 레퍼토리의 녹음이 이루어졌다. DG와의 녹음은 모두 라이브로 이루어졌다. 1983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명예단원(honorary member)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빈 필은 카라얀을 명예지휘자(honorary conductor)로 추대했다.] 1985년에는 자신의 최대 히트작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지휘해 전곡 취입했는데, [[오페라]] 성악가들을 주역으로 캐스팅한 것이 다소 까이기는 했지만[* [[호세 카레라스]]가 토니역이었는데, 토니는 설정상 폴란드계 백인이다. 그런데 스페인 출신인 카레라스의 영어발음이 극중 적대세력인 샤크파와 더 가까워(샤크파는 [[푸에르토 리코]]계) 녹음 중 계속 지적질(...)을 당했고 이에 열받은 카레라스가 녹음 중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갔다. 이 장면은 후에 발매된 영상물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또한 그렇게 여러번 반복해서 녹음을 했지만 최종결과물 역시 라틴계 발음을 떨치지 못해서 두고두고 까이고 있다.] 굉장한 기세로 팔려나가 베스트셀러 앨범이 되었다. 1985년에는 말러 교향곡 전곡 재녹음에 나섰다. 빈 필, 콘서트헤보, 뉴욕 필 세 개의 오케스트라가 동원되었다. 말러 전곡 녹음은 번스타인의 마지막 5년 동안 가장 중요한 녹음 프로젝트였는데, 끝내 8번 천인교향곡은 녹음하지 못했다. 80년대 중반부터는 빈 필이 아닌 오케스트라와의 녹음도 조금씩 증가했는데 시카고 심포니와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빈 필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을 연주하자는 번스타인의 제안을 거절한 바 있다.]을, 콘서트헤보와 슈베르트 교향곡을 녹음하기도 했다. 또 만년에는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종교음악 녹음도 진행했다. 1989년 12월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동서 [[베를린]]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베토벤)|교향곡 9번]]을 지휘해 두 차례의 기념 음악회를 열었고, 이 중 동베를린에서 열린 공연은 전세계로 실황 중계되었다. 1990년 초에는 건강 악화 때문에 잠시 입원하기도 했지만, 의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얼마 후 복귀해 예정된 공연들을 계속 강행했다. 하지만 그 해 8월 19일에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가진 탱글우드 페스티벌의 공연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베토벤)|교향곡 7번]] 연주가 마지막이 되었다. 이 공연의 실황녹음은 번스타인 사후 '최후의 콘서트(The Final Concert)'라는 제목의 음반으로 제작되었는데, 대략 3악장 중반부에서부터 음악의 긴장감이 점차 떨어짐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이 당시 기사에 의하면 3악장 중간 부터 기침을 시작하여 4악장이 끝날 때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연신 기침을 해대면서 간신히 공연을 마쳤다고 하며, 호흡곤란 증세로 공연 직후 입원했다. 입원 후에는 최대한 안정을 취하며 병세 호전을 기다렸지만, 이미 오랜 흡연으로 인해 폐가 회복 불능에 이르렀다는 진단을 받자 10월 9일 은퇴 성명을 발표했다. 5일 뒤인 10월 14일 뉴욕 자택에서 [[폐암]]으로 타계했고, 유해는 뉴욕 브루클린의 그린우드 묘지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